2016년 5월 26일 목요일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 1 [장 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 1 [장 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메디치상 수상작 극단의 지성과 야성이 어우러진 모험담지적이며 우아한 문체, 현실적 사건들 속에 철학적인 문제들을 녹여 내는 치밀함, 모자이크처럼 엮인 사건들을 이끌어 나가는 능란함으로 2008년 메디치상과 프낙상, 장 지오노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작가 장마리 블라 로블레스의 대작 소설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는 17세기의 비교적 평온한 유럽과 야성이 살아 있는 현대 브라질이라는 대조적인 두 세계를 병치하여, 마치 시간 여행으로 초대하듯 독자들을 단숨에 책 속으로 끌어들인다. 철학자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이기도 한 로블레스는 브라질을 비롯해 중국 티베트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살았던 경험에 움베르토 에코적인 박학다식함을 녹여 지적 욕구와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보기 드문 작품을 써냈다. 소설은 브라질의 알칸타라에서 언론사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는 엘레아자르를 중심으로 그의 헤어진 아내와 대학에서 민속학을 공부하고 있는 딸, 그리고 한 불구 소년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현대 브라질의 이야기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매 장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17세기의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전기이다. '바티칸의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 학자의 이야기가 현대 브라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도대체 어떤 접점을 가지는 것일까?걸어다니는 바로크의 백과사전, 시대를 앞선 인터넷 키르허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독일 태생의 예수회 신부이자 백과사전적 지식을 지닌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의 연구 분야는 수학, 어학, 지리학, 천문학, 음악, 의학, 고고학 등 온갖 영역에 걸쳐 있었으며, 수많은 주제에 관해 44권에 이르는 저서를 썼다. 작품 속에서 엘레아자르는 키르허의 미간행 전기에 주석을 달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키르허의 제자가 쓴 원고를 연구하게 된다. 오래전 대학에서 키르허에 집착하다시피 매달렸던 그는 이 전기를 읽으면서 점점 키르허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스승을 찬양하는 전기 저자와는 반대로 그는 키르허가 표절자, 사기꾼, 파시스트가 아닌지 의심한다. 일례로 키르허는 자신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했다고 믿었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었음이 후대에 밝혀진다. 방대했던 지식의 양과 비례하여 그 정확도는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우주'에서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키르허를 표현한 말은 인상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대를 앞선 일종의 인터넷이라 할 수 있었지요. 다시 말해서 그는 당시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지식의 50퍼센트는 정확했고, 50퍼센트는 잘못되었거나 공상적인 거였죠. 이런 비율은 요즘 우리가 컴퓨터 화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의 그것과 거의 비슷할 겁니다.' 17세기의 마술사와 탈근대의 꿈가장 선진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으나 예수회 신부로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라 여겼던 키르허. 한마디로 그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모든 지식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연출한 일종의 마법사였다 할 수 있다. 고화석을 찾기 위해 밀림으로 들어간 일라이니 일행이 마주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런 주술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원시인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가장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판단을 추구하는 엘레아자르가 반감을 갖는 키르허의 세계와 엘레아자르를 떠나려는 일라이니가 마주치는 세계가 맞닿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이 감성을 억압했던 근대를 벗어나 이제 우리가 접어드는 것은 '감각적' 이성의 시대, 즉 상상력과 꿈, 환상이 통합되는 탈근대 시대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종려나무 아래로 떠돌다 보면 탈이 나게 마련이요, 코끼리와 호랑이들이 제집에 있는 나라에서는 생각이 바뀌게 마련이다.이 책의 제목이자 제사로 쓰인 문구는 괴테의 소설 [선택적 친화력]에서 따 온 말이다. 작중 인물인 에우클리디스는 이 말을 , 낯선 땅에 내던져진 사람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은 뿌리 뽑힌 존재, 즉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잘해야 죽는 날까지 남의 문화나 흉내 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작품 속 여러 인물들에 모두 적용 가능한 이야기다. 가장 우선적으로 이국적인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어느 것에도 전문가가 되지 못했던 키르허가 그 대표적 예이다. 또한 고국 독일을 떠나 브라질에 정주하고 있는 엘레아자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원시림으로 들어간 일라이니, 한 인디오 청년과 그 문화에 철부지 수준의 인식으로 빠져드는 모에마, 부모를 잃고 복수만을 꿈꾸며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불구 소년 넬슨 등 사실은 작품 속 모든 인물이 어떤 의미로는 뿌리 뽑힌 존재로 읽힐 수 있다.로블레스는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는 여러 사례를 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관을 상실해 버린 이 시대의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줄거리브라질의 작은 도시 알칸타라에서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는 엘레아자르. 그는 통신원 업무보다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했다 여겨졌던 17세기의 학자 키르허의 미발표 전기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더 힘을 쏟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역 권력자들이 꾸미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행동에 뛰어든다. 한편 그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지질학자 일라이니는 지금껏 발견된 적 없는 고대 화석을 수집하기 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왕성한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만큼이나 예측을 불허하는 우림 한가운데에서 그녀 일행이 탄 배는 밀렵꾼들의 공격을 받아 난파하고, 육로로 숲의 출구를 찾던 그녀는 더욱 위험한 원시의 인디오들과 맞닥뜨린다. 키르허로 대표되는 17세기 바로크 세계와 엘레아자르가 살고 있는 현대 브라질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지식에 대한 갈망과 삶의 욕구를 지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 낸 작품.엘레아자르는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생애] 1장을 다시 한 번 뒤적거리면서 자신이 단 주석들과 몇몇 단락을 빠른 속도로 다시 읽었다. 맙소사! 시작이 참으로 형편없었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말투보다 더 끔찍한 것도 없을 것이다. 미화된 모든 전기가 대체로 그렇기는 하지만, 이 책의 어조는 그야말로 진부함의 극치였다. 페이지마다 양초와 수단 냄새를 너무 심하게 풍기고 있었다. 유년기에서 이미 '운명'의 전조를 읽어 내는 이 역겨운 방식은 또 뭐란 말인가! 하기야 그런 수법이 늘 먹혔던 것도 사실이다. (/ p.17)파푸스 박사는 이렇게 적었다. '신비학의 토대를 다진 사람들 중에서,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바티칸의 지지를 받고 자신의 저서들을 출간할 만큼 뛰어난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신비학을 고발한다는 미명하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비학을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약장수는 약장수를 알아본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 p.210)'하지만 그 역도 참이라네! 그것이 바로 방금 내가 인용한 단락의 정확한 의미야. 고향을 떠나, 자의로든 타의로든 어느 낯선 땅에 내던져지면 사람은 달라지게 마련이야…. 아무리 그 사람이 그곳 고유의 환경에 살고 있는 원숭이나 앵무새, 그리고… 토착민들과 가까이 지낸다고 한들, 그 자신이 뿌리 뽑힌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지. 그 사람으로서는 좌표를 잃고 절망하거나 아니면 그 새로운 세계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런데 어느 경우에나 그사람은 방금 우리가 말한 니그로가 될 수밖에 없네. 자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행한 자가 되거나 ─ 게다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조국과도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불구자가 되지 ─ 잘해야 죽는 날까지 남의 문화나 흉내 내는 배신자가 되는 거라네. 그 사람의 자녀들까지도 제 것으로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그 문화 말일세….'(/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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