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일 목요일

차마 그 사랑을 [카챠 랑게-뮐러]~

차마 그 사랑을 [카챠 랑게-뮐러]아, 해리,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 무엇이 우릴 이렇게 갈라놓았을까?네 삶이 바로 내 인생이었고, 지금도 내 인생인 너와 나를……[차마 그 사랑을]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카챠 랑게-뮐러는 이미 독일에선 날카로운 비평적 감식안과 독특한 표현력으로 우리 삶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해 독일 현대문학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작가이다. 1951년 동베를린에서 동독 지도층의 딸로 태어나 청소년 시절부터 ‘반사회주의적 행동’으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무단 가택 점거에 가담하는 등 일찌감치 반체제 성향을 보였던 작가는 숙련 식자공 직업교육을 받고, [베를리너 차이퉁]과 동독 TV에서 보조원으로 근무하고, 정신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몽골 유학 중에는 양탄자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등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경험은 1984년 서독으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에게 커다란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 카챠 랑게-뮐러는 서독에서 비록 늦깎이 작가로 출발했으나,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1986), 베를린 문학상과 알프레트 되블린 문학상(1995), 마인츠 시 작가상(2002), 카셀 문학상(2005) 등 수많은 상을 휩쓸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주로 사회부적응자, 패배자와 주변인의 삶을 형상화해온 작가는 이들 운명의 슬프면서도 우스꽝스럽고, 또 그로테스크한 면을 절묘하게 부각시킨다. 특히 분단된 독일과 동독에서의 삶, 통일로 뒤섞인 동서독인 사이의 혼란과 오해를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체로 묘사하는 것이 그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카챠 랑게-뮐러의 최신작 [차마 그 사랑을] 또한 이와 같은 작가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작품이다. 작가의 체험이 깊이 녹아든 이 소설은 독일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동독에서 이주해온 조야와 서독 남자 해리가 나눈 불행했던 사랑을, 또 그 사랑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승화되는가를 서정적이면서도 코믹한 문체와 독특한 감수성으로 그려 보인다. 조야, 해리를 만나다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이 년 전인 1987년 4월의 서베를린, 숙련 식자공이자 동독 탈주민으로 꽃 가판대 아르바이트를 하며 외롭게 살아가던 조야는 우연히 거리에서 서독 남자 해리를 만난다. 키 크고 잘생기고 말수가 적으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해리. 그가 먼저 조야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서독으로 넘어온 이후 남자들과 도통 인연이 없던 조야에게 그와의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네 눈길에 응수하던 나의 눈길에서 넌 알아차렸을 거야. 속내를 들킨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네 숨 냄새가 내 마음속에 일으킨 생각을 넌 어떻게 알아냈을까? 너희의 등장이 날 불안하게 만든 데다 그중 한 명이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진짜 섬뜩했지만, 한편으로는 흥분되기도 했어. 왜냐하면 그 한 명이 바로 너였으니까.그러나 그는 정키다. 십일 년을 감옥에서 보낸 어두운 과거가 있고 미래 또한 밝지 않은 마약중독자. 해리는 대체 의약으로 마약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인데, 이미 그 조건을 깨뜨린 전력이 있어 한번 더 어기면 즉시 체포될 처지다. 조야는 하나둘씩 밝혀지는 해리의 비밀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해리를 대체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도움을 줄 친구들을 구한다.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그가 에이즈 감염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청난 혼란을 겪으면서도 차마 그를 떠나지 못한다. 하지만 해리는 치료 프로그램을 모두 마친 뒤에도 보호관찰자와 조야의 눈을 피해 예전에 감방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마약을 계속한다. 조야의 집에서 저녁을 같이하기로 한 어느 날, 조야는 해리가 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택시를 잡아타고 해리의 집으로 간다. 있는 대로 옷을 껴입고 이불을 덮은 채 끙끙 앓고 있는 해리를 발견한 조야는 절대 의사에겐 연락하지 말라는 해리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부른다. 결국 해리는 마약 중독에 폐렴과 만성 간염, 에이즈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날 아침, 해리, 너와의 작별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어.난 고개를 떨어뜨리고 침대에 기대앉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날 바라보는 널 느끼고는 그제야 널 쳐다보았어. 네 동공은 구멍처럼 검고 깊었고, 시선은 유혹적이진 않지만 뭔가를 끌어당기는 듯한, 그래, 마치 자석 같았어. (……) “조야,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구나. 강한 남자는 널 약하게 만들고, 약한 남자는 널 강하게 하는구나. 그런데 넌 강해지고 싶어해, 그렇지?”퇴원한 해리는 다시 마약을 시작하고, 조야는 마약을 끊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다시 발병한 해리는 요양원에 들어간다. 조야는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는 해리를 보는 것이 괴롭고 힘들어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요양원 방문 횟수를 줄인다. 그 와중에 독일은 통일을 맞이하고, 해리의 짧은 생의 불길도 잦아든다. 네가 그곳에서 날 기다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추리닝이나 잠옷 차림으로, 상태가 약간 좋아지거나 혹은 나빠진 채로 팔을 내게 뻗으며 “우리 아기곰이 왔네”라고 말하는 널 볼 때마다 난 눈물이 솟구쳐 올랐고, 그걸 억누를 때보다 억누르지 못할 때가 더 많았어. 그러면 너는 날 가슴께에 끌어안고 “슬퍼하지 마, 네 해리가 같이 있잖아” 혹은 그 비슷한 말로 위로했지.(251쪽)조야는 끝내 죽어가는 해리와 온갖 혼란에 휩싸여 낯선 도시가 되어버린 베를린을 감당할 수 없어 새로운 삶을 찾아 스위스로 떠난다. 그리고, 해리는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그후 어떤 남자와도 진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던 조야는 한편에 밀쳐두고 차마 열어보지 못했던 해리의 유품 상자에서 그의 노트를 발견한다. 조야와 사귄 기간 동안 해리가 이런저런 속내를 적어놓은 그 노트에는 어쩐 일인지 조야에 관한 내용은 단 한 줄도 없다. 세월이 가도 떨칠 수 없는 해리에 대한 기억 속에서 삶의 의욕과 의미를 상실해가던 조야는 해리의 글을 읽고 나서, 그와 함께 지옥과 천국을 오갔던 자신의 입장에서 해리가 비워둔 칸들을 채워나간다. 그의 문장들이 결코 말하지 않았던 그의 삶과 사랑, 곧 그녀의 사랑과 삶을 비로소 이야기하는 것이다.베를린의 독특하고 데카당스한 세계에 바치는 오마주해리에게 쓰는 조야의 길고 긴 회상과 고백의 편지. 죽은 연인에게 부치는 편지가 바로 이 소설이다. 그리움과 멜랑콜리, 코믹함이 뒤섞인 어조로, 우울하고도 유머러스한 목소리로 읊어지는 조야의 독백은 그토록 아팠던 사랑이 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랑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일깨워준다.또한 이러한 조야의 독백은 독일 통일을 전후한 시기 베를린의 독특하고 데카당스한 세계에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하다.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 하나의 섬처럼 다시 동서독이 만나는 베를린, 양 체제의 분단과 만남이 기묘하게 어울리며, 베를린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독일 속의 외국 베를린의 모습이 조야의 시선을 통해 작품 전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조야와 해리로 대변되는 당시 베를린 사회의 아웃사이더와 백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또다른 아웃사이더와 백수라는 밑바닥 인생들의 관점으로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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